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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정용준

그 눈을 안다. 쉽게 내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위선적인 눈을 안다. 알게 된 걸로 잘해 주려는 어른은 거의 없다. 알아서 더 잔인하고 알아서 더 괴롭히는 어른들만 있을 뿐. - (p. 10)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작가 : 정용준
출판사 : 민음사
출간일 : 2020년 6월 26일
면수 : 172쪽
판형 : 128x188mm
ISBN : 9788937473289

정용준

2009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장편소설 『바벨』,『유령』등이 있다. 2016년 황순원문학상, 2016년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복수와 용서에 대한 고백록

 

정용준의 소설『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열네 살 된 주인공 ‘나’는 말을 심하게 더듬는 소년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소외와 폭력을 겪다가 그해 겨울 언어교정원을 통해 통과의례를 거치듯 성장한다. 언젠가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꿈’에 왔으면 좋겠다고, ‘사죄’하고 싶고, ‘밥’도 사주고 싶다고 했다(정용준,『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작가의 말, 문학동네, 2015). 소설의 싸움은 결국 얼마나 독보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그를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는데 정용준 소설의 플롯은 특정 캐릭터로부터 비롯되고 그 캐릭터에 의해 결말에 다다르곤 한다. 캐릭터는 이미 소설의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

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손을 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스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다. 내 첫사랑은 열한 살 때 만난 부반장이다. 치아에 금속 교정기를 장착하고 이마엔 좁쌀 여드름이 퍼진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아이였는데 그때 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정은 지나치게 차갑고 툭눈붕어를 닮은 돌출된 눈동자에 나를 향한 모멸의 불꽃이 이글거렸는데 그땐 그런 것조차 사랑스럽게 보였다. 왜냐고? 나에게 잘해 줬기 때문에. ― (7쪽)

부반장은 다른 남자아이에게 거절당한 초코바와 열두 마리 종이 거북이가 든 병을 내게 줘버렸는데 그것을 알고도 ‘나’는 부반장과 사랑에 빠진다. 스토커처럼 하염없이 부반장을 쳐다보는 내 얼굴에 그 애가 비명을 지르며 지우개를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조금이라도 잘해 주면 도통 헤어 나오지 못했던 ‘나’는 그 후로도 부반장 같은 사람들에게 상처만 받다가 문득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심한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나는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속지 않겠다.”라고.
누군가 모욕적인 방식으로 선물을 폐기처분할 때도 어쨌든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에 착안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오인했다가 상처받고 자학하고 마침내 차단하며 고립되는 것은 애정결핍을 비롯해 ‘나’가 지닌 다양한 심리적 왜곡과 결함을 짐작게 한다.
성장이란 미성숙한 존재가 성숙한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립성’과 ‘인격’ 그리고 ‘사회화’의 여부 등을 담보로 한다. 성장소설은 교양, 형성, 입사 등의 성장 개념을 바탕으로 인물이 능력, 신체, 태도 등에 있어 변화를 겪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깨닫고 세계에 재편되는 구도를 지닌다.
정용준은 그동안 가공할 힘과 부조리한 이데올로기를 폭력으로 행사하는 외부세계로부터 학대받는 무력한 인물, 그래서 언어를 상실 혹은 거부하고 극단적인 최후를 선택하는 주인공들을 주로 보여주었다. 가학성과 피학성, 신체의 훼손과 언어의 유실, 억압적 규범과 재생산, 자폐성과 죽음 의식은 정용준의 시그니처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조건과 존엄을 박탈당한 인물들은 수치심과 살의 그리고 대인기피와 자기혐오를 앓다가 안락사를 감행하듯 죽음보다 어두운 생을 자기 손으로 끝내고야 말았다.
이 소설 역시 미성년 주인공에게도 가차 없던 정용준 특유의 전형적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지만 미약하게나마 개인과 사회의 교섭을 통해 충만한 자기세계의 한 편린을 찾음으로써 성장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인물을 보여 주었다. (…)
이제 ‘나’는 복수심이나 나쁜 기억 때문에 글을 쓰지 않는다. 사회부적응과 반동으로서 이름의 폐기와 교환은 자아의 확인과 재건을 위한 글쓰기로 확장된다. ‘나’는 할머니가 잃어버렸다는 아들의 시점에서 쓰기도 하고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할머니의 시점에서 쓰기도 한다. 그러면서 원장과 할머니를 혹은 자신과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 복수를 다짐했지만 결국 용서하는 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짓고 감정을 표현하고 기억을 바꿔 이야기를 쓰면 진짜 이름이 되고 감정이 되고 기억이 되어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 복기에 의해 마침내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길버트 그레이프〉나〈내 책상 위의 천사〉같은 90년대 영화를 상기시키는「떠떠떠, 떠」에서 주인공은 병폐, 가난, 소외로 점철된 삶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구원받는다. 매우 유사한 자아인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나’는 더 나아가 글쓰기를 통해 자기를 찾아가는 루트를 가까스로 발견한다.
원장은 언어교정원에서 ‘나’를 처음 본 날 “잘했다”라고 “괜찮다”라고 말해줬던 최초의 어른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기에 더 잔인했기에, 진심으로 나를 이해해주는 원장에게도 ‘나’는 속지 않으리라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을 부라린 채 때리고 싶은 친구들과 죽이고 싶은 어른들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내던 ‘나’의 웅크린 첫 자세에서부터 ‘그’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다음을 쓰면 미래는 생겨”난다는 ‘작가의 말’까지의 낙차는 이 소설 전체를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바꿔놓으며 멋진 착지 장면을 기록한다.

 

글 : 신수진 Shin Su-jin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