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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김행숙

당신은 지금 막 외계의 생명체를 본 것이다. 당신은 온 우주에 뉴스를 전파하고 싶지만, 공포와 흥분으로 전신이 떨리고 특히 턱이 빠질 듯이 달달달달 떨리게 된다. / 나는 완벽한 벌레의 꿈이다. - 「변신」중에서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작가 : 김행숙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출간일 : 2020년 7월 22일
면수 : 138쪽
판형 : 128*205mm
ISBN : 9788932037547

김행숙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이별의 능력』,『타인의 의미』등이 있으며, 2020년 대산문학상, 2016년 미당문학상, 2015년 전봉건문학상, 2009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밤 중의 밤은

 

시인에게 시 쓰기란 무엇일까. 요컨대 그것은 학창 시절 자살을 꿈꾸었던 과거를 피투성이가 아닌 투명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시 쓰기, 죽음을 꿈꾸었던 과거의 ‘나’의 세계로 들어가 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즉 미래의 ‘나’를 발견하며 과거다운 과거를 되찾아 주는 시 쓰기일 것이다. 그러한 시 쓰기는 시인으로 하여금 삶이 아니라 죽음이 간절했던 그 시절로 용기 있게 거듭 회귀하게끔 하며, 동시에 그 반복적인 고통의 강박 속에서 “힘” 있는 미래를 발견하게끔 한다.
그러므로 앞서 확인했던 시인의 능동적인 부서짐과 해체에의 의지는 어떤 견고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혼돈”(「덜 빚어진 항아리」)에 다름 아닐 과거 속에 또 다른 과거를 찾아 주는 미래로부터의 힘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거기에 “전부”를 걸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과 현재의 ‘나’를 부수며, 거듭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강박적 고통으로 스스로를 혼돈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시 쓰기는,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현재의 원인에 다름 아닐 과거를 찾아 주며, 더불어 그 안에 존재했던 미래의 힘을 확인하며, 현재를, 스스로를 재구성해 나가고 있다.

내 기억이 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사람처럼 내 기억이 내 팔을 늘리며 질질 끌고 다녔다, 빠른 걸음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촛불이 바람벽에다 키우는 그림자처럼 기시감이 무섭게 너울거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아카시아나무보다 더 큰 아카시아나무그림자/ 그러나 처음 보는 노인인데…… 힘이 세군, 내 기억이 벌써 노인을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람보다 더 큰 사람그림자, 나무보다 더 큰 나무그림자, 우리가 빛이라 믿었던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우리 말고, 그런 우리와 더불어 항시 존재했던 저 그림자, 시인은 저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런데 저 그림자의 세계는,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지만 꿈을 통해 마주하곤 하는 모호한 ‘과거’가 아닐까. 항상 우리보다 더 크고 힘이 센 과거, 그림자에게 우리의 현재는 휘둘린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현재의 원인은 과거이며, 그 과거가 현재를 만든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확신의 시 쓰기와 더불어 바로 그 과거 속에서 먼 미래에서 왔을 한 노인을 만나고, 그 힘센 노인에게 ‘나’를 내맡긴다.
기억이 나를 앞지른다. 그간의 ‘나의 기억’은 저 노인과 함께 그간 기억하지 못하던 새로운 과거를 마주하고, 새로운 기억은 ‘나’를 넘어선다. 시인은 시 쓰기와 더불어 과거 안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을 확인한 까닭이다. 죽음보다 힘이 센 힘, 피투성이를 투명 인간으로 바꾸어 내는 바로 그 힘. 그런데 이 힘의 확인은 카프카가 환기한 절망이나 구원으로서 죽음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아닌가? 희망과 절망의 아포리아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망 쪽에 기울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나 진정 죽음에는 조금 모자란 죽음일지언정, 죽음과 가까이 있던 과거로 돌아가 그 안에서 그보다 강한 미래로부터의 힘을 확인하는 이 다른 이야기하기로서 시 쓰기는, 이야기가 거듭되어 이어질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인은 저 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죽음을 확인하고, 이를 생으로 전환하는 승리를 증거로 다시 거듭하여 또 다른 과거로, 즉 더 깊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에 가까운 과거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실행 가능한 유사 죽음의 반복 속에서, 끝없이 새롭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시인은 점차 더 깊은 죽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 아닐까.

밤마다 돌아오고, 돌아오고, 다시 돌아와서, 여름 캠프에 갔다가 피부가 까지고 그을려서 온 아이처럼 돌아와서 (…) 가벼운 소녀들처럼 춤추는 밤이 왔다/ 밤 중의 밤이 왔다// 밤마다 눈처럼 쌓이는 것이 있었으나, 밤마다 눈처럼 녹는 것이 있었으나, 흰 눈이 깊이깊이 쌓여서 두 발이 다 빠진 노인이 있었으나, 눈이 쌓이고 녹고 쌓이고 녹다가 이젠 다 녹아서 시간의 발자국이 몽땅 사라진 노인이 오랫동안 홀로 떨었으나
— 「아이가 왔다」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라니. 한 권의 시집을 덮으며 우리는 저 질문이 시인에게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전달된 질문이었음을 느낀다. 그러게 우리는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을까. 우리는 과연 그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 느끼며 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하다면, 필시 ‘소름 끼치는 희망’만을 반복하고 있다면, 시인을 따라 조금 부서져 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가 왔다. “그 창문의 얼룩 같았던 어두운 눈동자들이 이제 다 지워졌다.”(「그 창문」) 그렇다면 우리도 시인이 보여준 이 아름다움을 믿고 “밤 중의 밤”으로 조금 향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양순모 Yang Soon-mo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