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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한 되풀이황인찬

『사랑을 위한 되풀이』

작가 : 황인찬
출판사 : 창비
출간일 : 2019년 11월 30일
면수 : 174쪽
판형 : 128x188mm
ISBN : 9788936424374

황인찬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의 되풀이

 

시인이 직접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시집의 제목은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60년의 시차를 지나 다시 도착한 것이다. 동명의 표제작에서 전봉건은 산산이 부서지고 깨어진 한국전쟁의 끔찍한 시공간을 작품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그가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게 된 것은 오늘 이파리 같은 어린아이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전쟁 도중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는 이 아이들이야말로, 포탄보다 더 뜨겁게 불타올랐던 당시의 “사랑의 증거 그것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그는 외친다. 전후 달라진 시대의 지반과 칠 년의 간격을 두고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이, 그의 끔찍했던 과거를 사랑의 시간으로 뒤바꾼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지반 위에서 황인찬 시인이 달리 복원하고자 하는 조각난 기억과 사랑의 정체는 무얼까.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라는 제목은 각주에 언급되어 있듯, 2017년에 열렸던 성소수자 촛불 문화제의 표제인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에서 차용된 것이다. 시의 도입부에는 밤에 찾아와 사람의 뺨을 만지며 축복하는 “밤의 천사”가 등장한다. 한데 천사는 ‘나’와 ‘그’의 뺨을 만지고는 이내 놀라서 달아나버린다. 달아난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천사가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손잡고 있는 나와 그를 보자 있던 방이 사라”졌던 “서울역 근처의 모텔”에서의 기억과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천사가 축복해주지도, 그렇다고 요괴가 잡아가지도 않는 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각주의 정보나, 시적 정황, 종로삼가 등의 기표에서 어렵지 않게 동성애와의 관련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군대에 있는 동안 다시 써낸” 이 시는 “군대에 있는 동안 발표할 수 없던 시”이다. 그곳은 동성 간의 사랑이 법으로 금지된 장소이자, 최근까지도 동성애자를 색출하라는 지침이 통용된 곳이기도 하다. 종로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이런 일은 시로는 못쓰겠지”, 하고 자조하듯 되뇐다. 나와 그가 손을 마주잡은 일은 사랑이 될 수 없고, 시가 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나는 두렵지가 않”다. 시와 사랑이 금지된 그곳에서, 나와 그는 현실과 괴리된 채 닳고 닳은 한 쌍의 은유처럼 영원히 박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시라서, 그저 형편없는 시라서” 나와 그의 만남은 너절한 현실과 거리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것 같다. 우리를 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는 외적인 제약과 낡은 조건들이 사라지면, 숭고함도 비장함도 없이 평범한 두려움과 형편없는 시만 덩그러니 남는다. 그것을 아름다운 무언가로 다시 써내는 일은 이제 온전히 나의 몫인 것 같다.

떡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도 떡을 치는 사람들이 있군요

거리를 걷다보면 이런저런 이벤트를 만나는데요
오늘은 그렇네요 떡이네요

떡판 위에 올려둔 찐 찹쌀을
치고
치고
또 칩니다

(…)

떡을 치는 아저씨들을 보며 저는 어쩐지 어릴 적 좋아했던, 다시는 볼 수 없는 삼촌이 떠올랐고요

반죽을 주무르던 샌님 같은 삼촌의 흰 손이
자꾸 생각납니다

그후로 생송편은 먹어본 가운데 가장 강렬한 콩비린내로 기억되었고요

생송편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니고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였지만

어느새 떡을 다 친 아저씨들은 한입 크기로 썬 떡에 콩고물을 묻혀 나눠주네요

인절미는 쫄깃하고 콩고물은 고소하고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것만 같은 그런 맛이군요

모두 떡을 먹고 싶어서 줄을 섰습니다

(찬 바람 불어와 콩고물 흩날리며 무엇인가 깊어집니다)
– 「떡을 치고도 남은 것들」 부분

위 시편 속엔 크게 두 가지 시제의 ‘나’가 겹쳐 있는 듯하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떡을 치는 아저씨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지금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적 좋아했던 삼촌과의 시간에 속해 있는 과거의 나이다. 이 시를 보고 어떤 감각을 분배받을지는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떡을 치는 아저씨들”, “반죽을 주무르던” “삼촌의 흰 손”, “강렬한 콩 비린내” 등은 다분히 남성 간의 사랑과 성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이 때 두 시제 사이의 시차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내가 과거 기억들에 대한 감각과 평가를 사후적으로 다시 구성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아저씨 커플의 행위를 목격한 후 그들에게서 나눠받은 떡의 미감은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것만 같은 그런 맛”을 품고 있다. 즉 용기 내어 거리 위로 드러난 누군가의 사랑 덕분에, 잊고 있었던 혹은 무의식중에 숨기고 있었던 나의 과거는 본디 좋아했던 것만 같은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시의 제목이 ‘남겠다’, ‘남을 것’ 등이 아니라 ‘남은 것’인 까닭도, 이 시가 도래하지 않은 훗날의 시간을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부서진 잔해로 남아 있는 과거를 향해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글 : 조대한 Cho Dae-han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