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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쓰지 마라.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다. 처음, 그러니까 시작, 시작하기 전에도 처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건 무슨 말일까. 또 이래서는 안 돼. 이러면 안 돼. 또 이렇게 시작하면, 아니, 시작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 시작하면 안 돼. - (p. 7)

『숨』

작가 : 한유주
출판사 : 문학실험실
출간일 : 2020년 11월 5일
면수 : 128쪽
판형 : 115x183mm
ISBN : 9791197085420

한유주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3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소설집 『얼음의 책』, 『연대기』와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 등을 펴냈으며, 한국일보문학상과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남겨진 자들

 

친구가 죽었다. 자살이었고 죽음은 실행되었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13쪽) 아니 “어느 화창한 가을날”(14쪽) 아니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날”(17쪽) 아니 “어느 차가운 봄날”(39쪽) 아니 정확히 “3월의 첫 번째 금요일”(45쪽) 오후 학교 근처의 한적한 카페에서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이야기를 파괴하고 언어를 해체하는 거짓말쟁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언제 또 바뀔지는 알 수 없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한유주의 화자들은 이야기에는 재능이 없다. “이야기를 하려면 재단”을 해야 하고, 배열과 배치를 바꾸어가며 “자르고 붙이고 다듬고 잇고 바늘땀이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일에 능숙해야 한다(64쪽). 그러나 한 번도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러한 “언어의 경제적인 운용”(이상 65쪽)에 성공한 적이 없다. 완결된 적이 없는 서사는 쓰이지 않으므로 언제나 바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그런 점에서 한유주는 서사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야기의 재능과 사건에 대한 충실성(바디우)이 비례하지는 않을 터,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면서 친구의 죽음을 들었던 시간을 찾는 과정은 ‘제대로 된 방식으로 제대로 된 언어로’ 쓰기 위한 주체의 윤리적 응답이다. 『숨』의 ‘나’는 써야 한다와 쓰지 마라 사이를 횡단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통사를 완성하는 중이다. 통사를 잃었지만 통사를 앓는 중이다. 사건을 초과하지 못하는 언어들의 총량을 헤집고 뒤지는 작업이 한유주의 소설 쓰기인 듯도 하다.

다시 돌아와, ‘나’는 어느 해 3월의 첫번째 금요일 친구의 부음을 듣고 안산의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해안고속도로의 서부간선도로를 지나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직분기점 근처에서 죽은 비둘기를 보았다. 기억의 재구성 과정에서 비둘기는 몇 주 동안 도로가에서 ‘죽어가고 있었다’(여기서 죽음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로 표현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완료가 아니라 진행으로. 진행 상태의 죽음은 ‘나’를 진행 상태의 불편함에 머물게 하면서 애도를 지연하고 지속하고 종결되지 않는 사건으로 영속화하기 때문이다. 한유주의 소설이 현재적 회상으로 서술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은 현재에도 일어나기 때문이고, 사건의 주체와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들은 모두 ‘나’이거나 ‘너’이므로). 그리고 비둘기의 죽음은 한때 사랑했던 개의 죽음을 매개하고 개의 죽음은 걔의 죽음(걔의 죽음은 분명하지 않지만, 개에 대한 서술과 걔에 대한 서술들의 유사성이 증거라면 증거가 될까)을 매개하면서 정리되지 않은 통사들은 하나의 담화가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의 중심 서사는(작가는 이걸 분명히 싫어하겠지만) 친구의 죽음으로 가는 길 위의 시간을 정지하고 분절하면서 다른 존재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쓰(고 지우)기에 해당한다. 죽음을 애도하러 가는 길에 또 다른 죽음들이 놓여 있다. 애도는 연기되고 또 다른 애도가 수행된다. 하나의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상기하게 하고, 개와 비둘기의 죽음과 죽어감은 “현재적 회상”(p.101)을 통해 애도의 지연(또는 지속성)을 수행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나’는 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가? 찾아보니 작가는 이미 이런 독백을 남겼다.

나는 수많은 죽음을 방기하면서 나이를 먹어왔다. 친구들의 죽음 앞에서도 그랬고, 친구들의 죽음 뒤에서도 그랬다. 친구들의 죽음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눈을 감았고, 귀를 닫았고, 입을 막았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그전은 잘 기억나지 않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이제, 처음이 시작된 것일까. 어쨌거나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작하기로 한다. …(중략)…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써야 해, 쓴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써야 한다. 친구의 죽음에 대해 쓰겠다는 건 아니야, 그간 방기해온 죽음들에 대해서 쓰겠다는 것이지만 아마 쓰다 말 것이다. 그리고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다는 변명을 할 거야, 그런데 그러니까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써야 해, 누군가가 말했다. – 「private barking」, 11~13쪽.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는 길을 다시 회상하고 또 회상하면서 ‘나’는 “그간 방기해온 죽음들”에 대해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울 것이다. “그들이 살았을 때 관심을 가졌어야 했어”(25쪽)라고 후회하면서, 비둘기를 묻어주지 못했던 서부간선도로를 다시 지나가면서 쓰고 후회하고 쓰고 지울 것이다. 소설은 지속적으로 앞선 문장들을 무화하며 쓰일 것이다. ‘나’는 다른 ‘나’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와 비둘기의 죽음을,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친구의 죽음과 나의 자살과 누군가의 자살 이후를 이야기할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앞으로도 힘들고 더디겠지만, 다행인 것은 자살은 수행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애도의 작업이 종결되지 않을 테니까.

 

글: 김영삼 Kim Young-sam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