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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작가 : 안희연
출판사 : 창비
출간일 : 2020년 7월 24일
면수 : 152쪽
판형 : 125*200mm
ISBN : 9788936424466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나를 견디는 일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 필요해지면

꿀을 넣고 조린 열매를 떠올리기로 해

바를 정(正)에 과실 과(果) 자를 쓴다는,

말갛고 진한 색을 향한 기다림

-「톱」에서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간 여름 언덕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첫 번째, 희망 혹은 절망이 없는 세계 너머의 풍경을 보는 방법. 두 번째, 불안과 평온의 총량은 같다는 것. 세 번째,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나를 견디는 방법. “내가 나여서 우러날 수밖에 없는 시간”(「터닝」)이 있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기다리는 일.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그 시간을 다시 견뎌 내려는 의지가 내게 주어진 몫이다.
기다린다는 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다. “기다림은 망각을 다시 견뎌 내려는 움직임이고, 기다림을 다시 견뎌 내려는 움직임”[1]이라는 블랑쇼의 말처럼,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기다리는 일.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나를 잃어버리는 일.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나를 견디어 내기 위해, 잃어버린 나를 기다리는 일.
여기서 ‘그것’을 시(詩)라고 해도 될까. 아직 오지 않았기에 영영 오지 않는, 나의 시를 기다리는 일. 나에게서 우러날, 내게 우려질 말갛고 진한 시를 향한 기다림.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나를 견디는 일은 어느덧 시를 향한 구도(求道)의 자세를 닮아 가고 있었다.

나의 여정은
하나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은 나를 돌이라고 부릅니다
어딘가에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도 있다지만
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에 가깝습니다
절벽의 언어와 폭포의 언어
온몸으로 부딪쳐 가며 얻은 이야기들로 나를 이루고 싶어요
그 끝이 거대한 침묵이라 해도

중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나무나 새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우울을 떨치려 고개를 젓는 새와
그런 새를 떠나보낸 뒤 한참을 따라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서서 잠드는 것은 누구나 똑같더군요
모두가 제 몫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르는 돌」에서

내가 언제부터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름은 절반의 세계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뜨거운 여름날에는, 머지않아 다가올 차가운 겨울의 어느 날을 기다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만큼의 추운 겨울날에는, 뜨거운 그날의 열기를 떠올리며 다시 견뎌내려는 움직임을 품게 된다. 이제 시인은 기다림마저 잊는 순간을 향한다. 잊지 않기 위해 잃어버리는 일.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나를 견디는 것마저 잊는 일.
희망과 절망, 불안과 평온의 총량은 같으니, 불안해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평온해지기를. 불안한 만큼 평온해지기를. 불안하고 무참하고 아프고 슬프고 성난 괴물과도 같은 나의 마음을 고요히 잠재우기를. 불안이나 절망마저 침범할 수 없는, 까마득한 심연 속에 ‘그것’을 꽁꽁 묻어 두기를. 한없이 고요하고 깊은 곳으로 천천히 가라앉기를. 너무 평온하다 못해 무기력해질 때는, 꿈속에서도 ‘아, 이거 꿈이구나.’ 하고 알아채 버릴 때, ‘다 알 것 같다.’라고 스스로를 단정하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다시 한번 심연 속에 묻어 둔 ‘그것’을 꺼내 기억하기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톱」) 시인이 만든 여름 언덕에서 배운 건 기다림을 사랑하는 일이다. 시간이 아주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일. 기다림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더라도, 영영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자.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될 테니까. “그는 개와 함께한 날들의 몇 곱절을 지나 살아남았고/ 오직 도래라는 말만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말이 둥글고 따스한 말 같다고 생각한다/ 기다리면 껍질을 깨고/ 무언가 태어날 것 같은 말.”(「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에서)

 

글 : 전영규 Jeon Yeong-gyu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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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리스 블랑쇼, 박준상 옮김,『기다림 망각』, 그린비, 2009,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