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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린 가이드김정연

『이세린 가이드』

작가 : 김정연
출판사: 코난북스
출간일: 2021년 2월 1일
면수: 285쪽
판형: 152x215mm
ISBN : 9791188605170

김정연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다음 웹툰에서 만화 연재를 시작하게 된 만화가로, 대표작으로는 <혼자를 기르는 법>이 있다.

가상을 통해 대면할 수 있는 진실들에 대하여

 

김정연의 『이세린 가이드』는 예술적 가상이 어떻게 진실을 드러내느냐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오직 가상을 통해서만 실재 안에 은폐된 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미셰린(혹은 미슐랭) 가이드에 대한 모방처럼 보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 이세린은 음식 모형 제작자다. 매 에피소드마다 그는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음식의 모형을 제작하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해 들려준다. 배추김치 모형을 만들면서 할머니 이하 집안 여성들이 총동원되는 김장철의 불평등한 풍경을 떠올리는 것처럼 비교적 유사한 기억으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라면 모형을 만들다가 먹방 유튜버가 매운 라면을 고통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고 예능에서의 음식 복불복 장면을 상상하다 복불복으로 일진에게 걸려 돈을 뺏긴 십 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을 과거로 여행하게 해주는 마들렌과 홍차의 역할을 여기선 음식 모형이 해주는 셈이다. 여기에 이미 일종의 패러디가 있다. 음식의 익숙한 맛과 향을 통해 과거의 따뜻한 추억을 떠올리는 문화적 클리셰 대신 맛도 향도 없는 음식 모형을 통해 파편적인 기억과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짜’ 음식, ‘진짜’ 기억이라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
음식 모형은 음식의 모방이자 가상이지만 이런 가상은 실제 대상에 대한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세린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부패하지 않도록 한순간을 정시시킨다는 점은 나나 박제사나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음식 모형은 음식이 상한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가상이지만, 또한 이러한 가상의 도움 없이는 음식의 먹음직스러운 모습이란 다분히 연출된 것이자 찰나적인 것이며 음식은 결국 부패하게 된다는 것을 폭로하는 역할 역시 한다. 부패한 음식을 직접 보고 냄새 맡는 것은 고역이지만, 음식 모형은 너무나 먹음직스럽지만 먹을 수 없는 가상으로서 부패에 대한 진실을 역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예술의 역할, 작품의 역할과 동일하다. 예술은 가상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우리가 직접 대면하기 어려운 진실을 추체험하게 해준다. 세린은 자신과 꽤 친했던 둘째 오빠가 포트폴리오를 위해 자기 얼굴 본을 떠서 두들겨 맞아 죽은 여성 시체 모형을 만든 것을 알고 가족의 연을 끊는다. 심지어 가짜니까 괜찮다던 어머니조차 그 모형을 실제로 보고 더는 화해를 종용하지 않는다. 그 끔찍함에 대한 짧은 언급이 있지만, 심리적 충격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실제 구타당한 여성의 모습이 그 참혹함 때문에 가해자 개인에 대한 분노만을 자극한다면, 구타당해 죽은 여성의 모델을 당사자 동의 없이 만든 둘째 오빠의 무신경함은 그 참혹함을 가능하게 한 남성들의 구조적 무관심까지 드러낸다. 불편한 진실은 너무 불편해서 가상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미세린 가이드>는 ‘무엇인가를 복사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세린의 입과 업을 통해 만화로 세상을 재현하는 일에 대한 김정연 작가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전작에서 혼자 살거나 혼자 성장하는 게 아니라, 혼자를 기르는 것으로서 3인칭적인 거리를 두어야 밝힐 수 있는 진실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번엔 가상이기에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고 반대로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이 어떻게 가상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린 세린이 예절 학교에서 밥상 예절을 배울 때 사용된 밥상이 음식 모형으로 이뤄진 것처럼, 뭔가를 모방하는 세린과 세린 가족의 일을 ‘가짜’를 만드는 걸로 비하하고 최종적으로 어머니의 짝퉁 가방을 비웃는 친척 앞에서 세린 가족 모두가 거짓 웃음을 지었던 것처럼, 현실의 생활세계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나 진정성 같은 것들 중 일부는 허구적이다. 음식 모형이 음식보다 음식에 대한 진실을 더 잘 드러내고, 현실에서 유의미해 보이는 게 사실은 의미 없는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듯, 세계를 모방하는 가상으로서의 만화 역시 ‘진짜’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의 허상을 폭로하고 해체하며 세상의 폭력적 진실을 비교적 안전하게 매개할 수 있다. 작가 특유의 탁월한 위트는 진실을 대면하기 위한 완충재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가상의 위트는 현실의 웃음기 없는 폭력을 역으로 폭로한다. 전작에서부터 이를 실증해온 작가는 『이세린 가이드』를 통해 일종의 자체적 작품론까지 써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다른 가상들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할 신뢰할 만한 ‘가이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글: 위근우 Wee Geun-woo
칼럼니스트